도쿄에 와서 벌써 세 번이나 짐을 잃어버렸다. 그 때마다 늘 동경 경찰과 마주해야 했는데 그들의 관료주의는 한국 경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물로 한국 경찰도 관료주의적이다. 하지만 한국 경찰의 관료주의가 그냥 커피라면 일본 경찰의 관료주의는 top라고나 할까.
도쿄에서 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가장 먼저 가게 되는 곳은 아마 근처의 코방 즉 파출소일 것이다. 파출소에 가면 한국의 70년대 경찰복 같은 옷을 입은 순경들이 띠꺼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그 앞에서 잔뜩 당황한 체로 가뜩이나 어설픈 일본어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영어로 말하면 대충 알아 듣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일본에서 그렇게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노... 와타시가... 니모쓰오...(~)데... 와스레떼 시맛떼....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면 기다리는 건 끝없는 조사서의 행렬이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언제 잃어버렸는지, 내 이름, 주소, 전화번호,국적 심지어 일본의 체류 기간까지. 도쿄에 와서 지금까지 총 세 번 짐을 잃어버렸고 그 때마다 한 시간 가까이 조사서를 써야 했다.
예를 들어, 도쿄에 와서 처음 잃어버린 것은 휴대전화였다. 그것도 도쿄에 도착한 첫 날. 커다란 이민 가방을 들고 공항에서 신주쿠 역에 내려 기숙사를 찾아 가려 탄 택시에 휴대전화를 놓고 내린 것이다. 타지에서 휴대전화나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피가 차게 식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다. 나는 등 줄기에 식은 땀을 흘리며 근처 파출소에 갔고 파출소 순경은 너무나 친절하게(그들의 말투는 언제나 정말 친절하다)말했다.
"택시 영수증도 없고 번호판 넘버도 모르니까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조사서는 쓰고 가야 한다."
동경 경찰은 늘 짐을 잃어버린 나에게 긴 조사서를 쓰게 했지만 그들이 한 번이라도 내 짐을 찾아 준 적은 없다. 처음으로 잃어버린 물건인 휴대전화를 찾아준 건 내가 휴대전화를 놓고 내린 택시 기사였고 두 번째로 잃어버린 물건인 휴대전화 유심 카드를 찾아 준 건 게이오 선 역무원이었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여권과 건강 보험증 그리고 지갑이 든 가방을 찾아 준건 버스 기사였다.
동경의 경찰은 정말 긴 조사서를 쓰고 새벽 1시에 가방을 잃어버려 집에 갈 차비도 없다는 나에게 경찰서에서 밤을 세는 건 원칙에 위배되니 집에 갈 차비를 빌려주겠다고 할 정도로 원리 원칙을 따지는 이들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단 한 번도 짐을 찾아 준 적이 없다. 그들의 융통성 없음과 무관할 정도로 성업하고 있는 도쿄의 풍속 업소들처럼 도쿄 경찰의 관료주의와 원리 원칙은 참 답답하기만 했다.
이렇듯 짐을 잃어버린 얘기나 동경 경찰의 답답함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경찰만의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사실 동경의 모든 것들이 동경 경찰을 닮았다. 적어도 내게 동경은 거대한 관료주의의 집단과 같은 인상을 준다.
동경은 동경을 가로지르는 거미줄 같은 메트로처럼 얽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 어떤 확답도 의견도 제시하길 거부한다.
일본인은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보다도 더 수동공격적이고 책임 지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변화하는 것도 싫어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동경 사람들은 더 그렇다. 좀 다른 게 있다면 동경 사람들이 이러한 성질은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기반에서 나온다는 거다.
즉, 나는 남의 의견에 관심 없고 남의 처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내 처지나 감정 의견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관심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관료주의다. 모든 것이 정해진 절차와 관습에 따라 움직이고 그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의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의견이란 몇몇 식자층과 엘리트 계급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일본식 엘리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낸 거대한 관료주의적 공동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의견을 박탈하고 그들은 철저한 익명의 개인으로 남게 만든다. 그리고 동경은 이런 무관심한 익명의 개인들의 거대한 집단과 같은 도시다. 이곳은 거대 자본 위에 세워진 도시지만 왠지 모르게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의 도시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경의 자본과 그 안의 개인들은 자유 세계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 방식은 오히려 냉전 시대 공산주의 국가 개인들의 존재 방식에 가깝다.
동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숨긴 체 지하철을 타고 밀려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나는 이곳에서 외국인으로 있기 때문에 사실 어느 정도 일본 사회의 관료주의적 질서 밖에 있다. 나는 경찰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일부러 영어로만 말하기도 하고 여자력 같은 소위 빻은 말을 하는 일본 남성을 질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외국인이기에 일본 사회의 통념을 완전히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것 뿐이고, 도쿄의 개인들은 오늘도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음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의 의견을 숨기고 편한 생활을 할 것인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불편한 인간이 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관료주의에 세계에서 기존의 관습에 벗어나는 삶을 사는/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적어도 도쿄는 한국처럼 서로 간섭하는 사회가 아닌 철저한 무관심의 익명이 되는 사회이니 좀 더 편하게 살고 있을까? 아님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낼 수 없는 도쿄의 분위기 속에 숨 막혀 하고 있을까?
내가 일본에 오기 전 만났던 동경 출신의 친구는 일본이 너무 답답해서 도망치듯 떠났다고 했다. 이제는 그 친구가 어느 부분이 답답했던 건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댓글
댓글 쓰기